정리된 글이 아니라 TV화면에다 마소 ppt파일을 한컴 프로그램으로 억지로 열어 보았던 발표에 대한 코멘트이기에 정확한 인용을 할 수도 없고 세밀한 논의를 진행할 수도 없으나 이틀 전 들었던 발표의 인상을 적어 보기로 한다.  글이 아니라 ppt, 커다란 스크린이 아니라 hdmi 캐이블로 컴퓨터의 화면을 출력한 TV화면이었음을 강조한 이유는 이 감상이 발표자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몇 개의 매개를 거친 ‘다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코멘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학위 논문에 대한 평이 아니라 논문과 연결되어 있으되 별개인 ‘무엇’이다.

발표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익명] 이라는 이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규정은 그 발표가 21세기 초반에 인터넷(사이버스페이스)에서 등장한 어나니머스라는 해커 집단에 대한 연구라는 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익명이라는 이름에 대한 연구라는 규정과 인터넷의 어나니머스라는 이름의 해커집단에 대한 인류학적 기술이라는 설명은 어떻게 다른가(혹은 같은가)를 쓰는 일이 그 발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갈림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분명 누군가는 인류학과라는 분과학문의 학위 논문으로 작성 중인 본 발표가 [익명이라는 이름]에 대한 연구라는 점을 결정적인 단점/무리수라고 진단할 것이다. 반대로 나는 그 지점이 이 논문이 주목받아야할 가장 심오한 지점이라고 본다.  그럼 그 차이는 무엇인가?

금반지와 구멍에 대한 코제브의 유명한 문장에서 시작해보자.

금반지에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금이 없다면 ‘구멍’(그렇다면 구멍은 아예 실존할 수도 없으리라)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금은 구멍이 없더라도 실존한다) 또한 반지가 아니다.
– 알렉상드로 코제브의 [역사와 현실 변증법] 에서

그 발표를 ‘인터넷에 등장한 어나니머스라는 해커집단”에 대한 연구로 파악하는 방식은 금반지를 ‘금으로 만들어진 원형의 물체’라고 보는 것이며, 익명의 이름이라 보는 파악하는 것은 금반지를 금과 구멍으로 혹은 금밙에게 본질적인 것을 구멍으로 보는 것이다.  첫 번째 방향에서 본다면 그 발표는 허점 투성이였다. 어나니머스라는 해커(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어떠한 ‘사회적’ 설명도 제시되지 않았다. 미국 서부의 반-사회적 지향을 지닌 백인 남성들이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어나니머스라는 간판을 내건, 해커집단의 (사회적) 속성이라는 설명방식은 반지=원형의 물체임을 전제한 후 금 반지란 금으로 만들어진 원형의 물체라는 소결을 내는 것과 유사하다.  두 번째 방향은 구멍과 금 사이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어나니머스는 익명이라는 이름 즉 이름 아닌 이름이다.  이름이 아닌 이름은 이름인가 아니면 이름이 아닌가? 라는 질문의 무게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 발표의 어떤 부분에도 온전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2.

이름이 식별하기 위한 것이며 (최종적인) 책임귀속을 위한 필수적인 장치라면 이름 없음이란 어떻게 쓸 수 있는가? 그것은 이름으로부터의 도망/탈주일까? 인류학에서 더 나아가 인문사회과학에서 규칙수행이 아닌 연행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항상 구성되고 구성하는 주체를 강조하면서 택했던 방식은 이름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타자에 대한(혹은 통치대상에 대한) 정의란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을 강변하였다.  그러한 논의의 운동장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형성 중인 주체(subjects in making)가 이동하는 지점들 즉 하나하나의 정박점들 사이를 [익명]이라 말할 수 있다. 여럿의 가면을 을 바꾸어 쓰는 와중이 [익명성]의 원천이며 정체라면 익명은 자기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규정하지 않은 상태 혹은 기존의 이름을 거부하는 순간을 칭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가면을 바꾸어 쓰는, 짧은 간격 혹은 일시적인 이름 없음을 길게 연장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이름이라 주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즉 이름없음(익명)이 하나의 규정/정의/이름의 불완전성이나 억압성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익명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채택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때의 익명은 무명씨 혹은 필명, 가명, 인터넷에서의 닉네임과 같은 것과는 별도의 차원을 구성하게 된다. 무명씨, 필명, 가명, 닉네임이 영향력 없음이나 검열로부터의 도피 등을 위한 한 개인의 전략이며 ‘하나의’ 고정된 이름에 대한 거부에 머물러 있다면, 선언하고 개입하며 작동하는 어나니머스는 ‘이름 전체’를 거부하기 위해 [익명이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3.

1에서 제시했던 첫 번째 방향에서 본다면 어나니머스라는 인터넷 집단을 연구하는 작업은 어나니머스를 [이름]으로 보고 그것을 더 작은 이름들 즉 계급, 국가, 성차, 목적, 수단 등으로 분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들을 쭉 이어붙여서 어떠한 속성과 자질들의 연결이 아나니머스를 하나의 집단/이름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방향은 어나니머스를 [익명이라는 이름] 즉 오퍼레이션으로 밖에는 칭할 수 없다.  익명의 이름인 그들은 수형도도로 그릴 수 없는 전개 자체를 오퍼레이션이라는 [익명의 이름] 을 통해 선언하고 호명한다. 이 작업은 역설적인데, 이름을 거부하기 위해 [익명이라는 이름]을 선포하는 일과 같다.  익명의 이름은 금과 구멍 양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금반지와 같이 이름과 이름없음 사이, 선언과 (자기자신을 향한) 무책임 사이에 있다.

나에게 이 작업은 다음과 같은 해프닝을 떠올리게 한다. 투표하지 않는 젋은이들을 정당정치로 끌여들이기위해 30-40대의 성공한 젊은이(?)를 입당시키는 일,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무차별적인 선거독력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일.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서민들의 눈높이에 맞도록 지역구의 땅값과 임대표를 높이기 위한 방도를 더 많이 개발해야한다고 강변하는 일. 이런 것들이 겹쳐지면 젋은층의 투표율이 올라갈까? 아마 앞으로 그 전략들의 결과 몇 퍼센트의 투표율 상승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때의 젊은 층은 이미 지금의 386세대와 같이 변화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온라인과 구분되는 오프라인에서의 삶의 특징을 나열하고 그 귀결로 어나니머스의 등장과 활동을 설명하려는 작업은  – 그것은 오프라인에서의 특징을 +로 두고 온라인을 -로 때로는 결여와 배제와 방종으로 규정하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아직 [익명의 이름]으로 선언하지 못한 것들이 사이버스페이스 안과 바깥을 넘나들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익명의 이름은 외부자를 거부하고 엄격한 입회절차를 통해 스스로를 가둔 인터넷 커뮤니티와 가장 먼 곳에서 있고,  수십톤의 폭탄을 떨구어도 척결되지 않는 IS이란 탈영토적 국가-유령 바로 곁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