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의식하고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부터 나는 누군가의 글을 읽은 후에 평하거나 발제문을 작성할 때  “만일 내가 저자라면 그래서 이 글을 다시 써야만 한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라고 상상하고 글을 썼다. 그래서 때로는 저자가 말하지 않은 그의 욕망을 상상해 쓰기도 하고, 그(녀)가 주저하는 지점을 드러내고 폭주하기도 하며, 완전히 다른 글을 써두고 그에 대한 코멘트라고 우기기도 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버릇을 이야기했을 때 들었던 반응은 ‘위험하다’ 였다.  확실히 그러하다. 때로 내가 덧붙인 글은 원전을 읽지 않으면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헛소리가 되기도 했고, 글의 저자에게 직접 코멘트를 했을 때엔 오만하고 불편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때때로 저자에게 좋은 반응을 듣기도 했는데 그 경우엔 ‘내가 쓰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는 식의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할 때보다는 실패할 때가 많았다. 특히 책 너머의 저자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실패였던 것 같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의 첫 문장은, “우리는 둘이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다.  이 알쏭달쏭한 문장은 오랜 시간동안 나에게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뛰어난 학자인 두 사람이기에 각자를 정의하거나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 생전 처음으로 ‘둘의 이름’으로 (실제로 나의 역할을 20%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글을 쓴 이후 그 의미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공동저자인 그의 글을 읽었고 평소에 코멘트 하듯이 만약 내가 저자라면 다시 쓰고 싶은 것들을 상상하고 답변을 보냈고, 공동저자인 그는 내가 무엇을 썼는지 묻고 그에 대해 답하듯이 글을 고쳐나갔다. 그래서 괴작이 탄생했다. 그 글이 괴작인 이유엔 촉박했던 마감시간이나 나에겐 생소한 분야에 대한 무식함도 들어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쓴 것을 읽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나의 생각과 또 내가 쓴 것을 읽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그의 생각이 뒤엉켜 첫 청사진에는 그리지 않았던 결과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첫 문장을 내 맘대로 고쳐쓴다면, “우리는 둘이 썼다. 우리는 같은 글을 쓸만큼 ‘하나’였기 때문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그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다른 것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계속 쓸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되었다. ”  물론 이런 느낌을 항상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해진 틀 속에서 정해진 부분을 약속대로 써서 붙여 넣는 프로젝트 보고서에 공동작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음을 자명하다.  공동작업은 어렵다. 그리고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