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주로 관찰했던 노인분들은 자신의 행동이 “꼰대질”로 비치는 것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차마 못했던 꼰대질을 지하철이라는 익명적 공간에서 행하는 그런 세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 두려움을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일 때문이든 뭐든 젊은 사람들과 교류해야 할 여지가 있는 40대, 50대 정도인 것 같고요. 또 꼰대로 비춰질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지는 분들은 대부분 지하철에서 그렇게 용기내서 꼰대질을 행하시는 분들도 아닌 것 같아요. 침묵이 전제되어야 할 비장소로서 지하철에 소음을 만들어내는 노인분들은 자신이 “꼰대”로 불리는 것에 불같이 화를 내시는 분들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말하는 것은 여지없는 사실이고, 지켜야 할 질서라고 생각하시니까요.

하지만 저 역시도 지하철 공간이 주는 익명적 특성-그리고 그로 인해 획득한 가면은 이러한 소음을 만들어내는데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익명적 공간이라도 자기 혼자 있으면 감히 그런 행동을 못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지하철이라도 1호선과 같이 노인분들이 많은 곳과 2호선 같이 젊은이들이 많은 노선에서의 행동패턴은 분명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즉, 익명성뿐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인터뷰를 해보면, 한겨 레 신문 읽는 젊은이를 혼낸다던지,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지하철에서 데모하는 거 혼내는 노인분들에 대한 다른 노인들에 대한 반응은 “나는 용기가 없어서 차마 못했지만 저 양반이 용기내서 할 말 하는거다.”라고 옹호를 하거나 “너무 심했다. 그래도 왜 그런지 그 심경은 알만하다.” 정도의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동의는 하지 못하더라도 심정적으로 동의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용기도 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쓸데없이 길어졌지만, 사이토 준이치의 친밀권을 핵심으로 다뤘던 목요일의 콜로퀴엄 뒷풀이에서 이 주제를 떠올렸던 이유는 사이토가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에도 포함되기 어려운 ‘버려짐’의 문제에 주목했다는 지점인데요. 노인들이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행하는 이러한 투쟁이 사이토가 제시한 그 ‘버려짐’이라는 감각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지은숙님께서는 “사이토에 따르면 ‘내가 없어져도 상관없지 않나’라고 스스로의 존재의 현실성을 의심하는 버림받은 이들에게 존재에 대한 긍정을 획득하는 문제가 정체성에 대한 승인 이상으로 통절하고 뿌리 깊은 문제일 수 있다”라고 정리하셨는데요. 노인들이 익명의 공간에서 그렇게 한풀이 하듯이 간헐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그런 노인들이 그런 문제를 어쩌다 일으켜도 되는 안전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유는 그 곳에 가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다른 곳보다 많고, 동참은 못하더라도 공감은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럼 그런 잠시간의 연대-공감-혹은 모른척 해주는 행위도 친밀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어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사이토는 물론 그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타자들과의 지속적 관심과 배려를 통해서 그것이 대항적 공공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좀 궤도가 달라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에 논의를 시작하는 그 ‘버려진 느낌’-돌봄에 장기간 속박되어 있거나 도시고령자와 같이 명백한 문제집단이 아니지만 사실상 고립된 존재들로부터 그 논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꽤 흥미롭게 들리더라고요.

저는 지하철에서 노인승객, 특히 남자노인승객들이 이러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이유를 일종의 리듬의 충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돈을 지불한 만큼의 권리만을 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가 체화한 자본주의적 리듬과 돈도 물론 중요하지만, 권위 앞에서는 돈도 그 위세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적 리듬의 충돌이 그 중에 하나인데요. 이 세대들 중 상당수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고, 또 박정희 시대에 진한 향수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요. 즉, 박정희 시대를 거쳐왔고, 그 시대에 자본주의를 경험하고, 군사주의가 횡횡하던 시대의 질서감각이 체화되어 있는 분들이시기도 한 거죠. 이분들은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배웠고, 그래서 이제 자신이 바로 그 대접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왔는데 시대는 너무 바뀌었고, 심지어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나 질서를 내세우면 ‘꼰대’ 취급을 하는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강한 분노와 안타까움, 불안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당시 그토록 강한 지지를 보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Tv 대선토론 때 이정희 후보가 당시 박근혜 후보를 타겟으로 삼아 공격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제 주변의 중장년층들은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을 ‘문제적 존재’로 폄하하고 반박을 못하게 따박 따박 대드는 젊은 세대들과 이정희 후보를 겹쳐서 보고, 공격을 받으며 기가 막혀하는 박후보에 자신을 대입시키시면서 이정희 후보를 “나쁜 x”라고 욕하며 분노하셨던 모습도 떠오르네요.

지하철은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조차 생경한 지금의 노인들에게 주어진 몇 개 남지 않은 자리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남성노인들은 일을 그만두고 나서 갈 곳이 정말 마땅치가 않지요. 여성노인들은 집이라는 공간을 적절히 활용할 수도 있고, 손자녀를 돌보는 인력으로도 활약을 펼치고 있지요. 반면, 남성노인들은 낮 시간에 집에 있는 것도 불편하고, 자식들 대학 보내고 먹여 살리느라 자기 자신을 위한 취미를 만들거나 노후를 위해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이 그냥 열심히 달리기만 한 세대죠. 그런데 적어도 젊은 날에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산업역군”이라는 사회적 인정이라도 받았는데, 지금은 인정은커녕 꼰대취급 받으며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으니 그 상실감은 더욱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현경 선생님의 논지를 빌리자면,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일정한 일상생활의 의례가 행해질 수 있는 장소가 주어져야 하는데 남성노인들에게 지하철은 그나마 아직까지는 보장된-그들을 위해 예약된 자리이고, 그 자리에서나마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나 다름없는 꼰대가 아니라 아직도 “젊은 너희들이 배워야 할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종의 투쟁이 아닐런지요. 하지만, 그러한 투쟁이 “꼰대질”로 묘사되고, 문라커님의 표현처럼 “발악”으로 읽혀지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투쟁방식이 사람들의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결국 그들이 행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벌이는 투쟁으로 인해 그들은 젊은 세대들과 더더욱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럼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벌이는 투쟁을 뭐로 개념화할 수 있을까..그게 제가 아직 안고 있는 고민입니다. 제임스 스캇의 일상적 저항인 건가, 노인들을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자본주의적 시선에 대한 저항? 지하철이라는 공통체(commons)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하는 건가. 아니면, 비공간이라 하지만 일종의 공공공간으로 보고 공공공간을 사회적으로 구성하려는 실천(세타 로우)로 볼 것인가?

아무튼 그렇습니다.